응봉산~육백산
깊은 오지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다
문의재~응봉산~육백산~웃밭골 15km
"응봉산 아세요?" "응봉산? 덕풍계곡과 덕구온천으로 유명한 거기 말이에요?" 예상한대로 열이면 열, 대답은 한결같다. 999m의 응봉산은 알면서 1268m의 응봉산을 모르다니. 아무리 고봉준령이 즐비한 강원도지만 키 순서대로 나열하면 그래도 '한 키' 하는 산인데 산행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망이 좋지 않아서? 등산로가 아주 험해서? 태백에서 만난 김부래 주재기자는 "응봉산과 육백산 모두 정상까지 임도가 잘 나 있으니 그쪽을 이용하면 쉽게 산행을 할 수 있을거다. 응봉산에서 두리봉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인근 마을에서 설치한 올무와 덫이 많으니 조심할 것" 이라며 조언을 해준다. 태백은 벌써 불어오는 바람에 짙은 가을 냄새가 베어 있다. 태백에 내려간 날 저녁부터 비가 오더니 밤새 내렸다. 여름 한철 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아니라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가을비였다.
가을 단풍이 기대되는 문의골
태백에서 도계읍 신리로 넘어가는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휴가철이 지나고 더위도 한발짝 물러섰으니 붉은 단풍이 드는 9월 말이나 눈꽃 피는 겨울까지 관광객의 발길은 잠시 뜸할 것이다. 가는 길에 들른 미인폭포는 이름과 달리 우람한 면모를 자랑하고 그 아래로 흘러내린 통리협곡은 과연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릴 만큼 위용을 자랑한다. 여름철 계곡산행 코스로도 적합할 만큼 규모가 대단하고 풍경이 아름다웠다.
들머리 직전 도계 신리의 너와집을 구경하며 동네주민에게 응봉산에 대해 물어보았다. "응봉산? 거기가 어디여? 우리 동네에는 그런 산 없어." 예서 한 평생 살아왔음직한 할머니까지 정작 바로 앞에 솟은 응봉산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다. "할머니, 저기 앞에 보이는 커다란 봉우리 있는 산이 머예요?" "아, 그것은 육백산이지. 응봉산은 잘 모르겠어" 하며 휘적휘적 갈 길을 가버린다.
너와마을을 지나 문의재 터널 직전 왼편으로 나있는 임도로 올라선다. 차량통행을 위해서인지 가드레일까지 부수고 길을 냈다. 왼편으로 계곡을 끼고 올라 산허리를 돌기 직전 너른 공터에 차를 세웠다. 동부지방산림청에서 세운 '산불조심' 간판 위로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으~춥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찬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제 내린 비로 기온은 한층 떨어졌고 하늘은 언제 비가 올지 모르게 찌푸려있다. "이런 날엔 특히 저체온증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 겨울 백두대간 연속종주를 마친 정성필(41세)씨 말에 모두들 보온재킷을 입고 오른다.
"앗, 따가워~" 시작부터 가시 섞인 잡목들이 반바지를 입은 기자와 정성필씨의 다리에 새빨간 생채기를 낸다. 이런 신고식도 잠시, 길은 잘 나있다. 수십 미터의 적송과 노송들이 즐비한 산길은 금방 문의골과 만난다. 폭이 10여m 정도 되는 작은 계곡 주위로는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득 뒤덮다시피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등산로는 발목 높이로 수북히 쌓인 낙엽들 덕분에 푹신한 양탄자를 밟는 것 같이 편안하다.
계곡을 몇 번 넘나들며 고도를 높이자 작은 폭 포 하나를 만난다. 양끝이 갈라져 떨어지는 쌍폭으로 전날 비가 왔음에도 수량은 그리 많지 않다. 얼마 온 것 같지 않았는데 30여분이 흘렀다. 정성필씨는 바람 잦은 계곡으로 들어서 갑자기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는 계곡에 그대로 누워 냉욕을 즐긴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데 정작 본인은 겨울 추위를 이기는 방법이라며 시원해한다.
폭포에서 5분 남짓,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계곡 깊은 곳으로도 길은 보이는데 왼편으로 난 능선길에 마음이 끌린다. 가파른 능선을 가로지르는 등산로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지만 길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8부 능선으로 20여분쯤 등산로가 이어지더니 등산로가 사라진다.
"저 위쪽으로만 오르면 길이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올라요." 위쪽 능선에는 세 명이 겨우 서 있을 정도의 좁은 터가 있어 한숨을 돌린다. 있을 거라 짐작한 길은 없다. "어쩍하죠?" "응봉산 줄기로 올라왔으니 가다보면 길이 나오겠죠. 무조건 전진해요." 억센 잡목들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 가는데 갑자기 길이 나온다. "이 길 어디서 나타났어?" 아무리 둘러봐도 앞쪽으로는 길이 분명한데 뒤쪽으로는 무성한 잡목들 뿐이다. 주변으로는 벌목한 흔적과 함께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흔적들이 무수히 많다. 얼마나 큰놈인지 온산을 다 헤쳐 놓은 것 같다.
큰 노송 몇 그루가 산 중턱쯤 자리잡고 있는 구간을 지나면서 길이 점차 가팔라진다. 1136봉우리의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서자 바로 앞으로 널따란 임도가 산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앞을 막고 있는 가시덤불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서야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는 정확히 산허리를 반으로 잘라먹으며 구불구불 아래로 이어진다. 최근에도 올라왔던 듯 타이어 흔적이 뚜렷한 길을 지나 응봉산으로 향한다. 길은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300여m를 내려가면 왼편에 있다.
하지만 글은 또 금방 끊어진다. 축지법이라도 쓰는 사람이 만든 것인지 잘 닦인 등산로가 있는가 싶더니 어느새 잡목에 갇혀 허우적대고 또 다시 길이 나타나고. 작은 바위봉우리 하나를 올라서면 길이 완만해지고 응봉산이 지척이다. 길가엔 녹슨 철조망이 반쯤 흙에 묻혀 드러나 있는데 예전 군사시설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응봉산 정상 직전 오른쪽 아래로 건물 두 채가 들어서 있다. 정상까지는 불과 50여m. 이날은 여기서 머물기로 한다. 입구에는 응봉산장이라 적혀 있는데 앞서 보았던 철조망과 내부구조로 미루어 옛 군막사로 짐작된다. 문은 고리가 채워져 있으나 잠겨 있진 않다.
안으로 들어서니 침상과 커다란 난로 하나, 스티로폼들이 침상에 깔려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빗물이 샜는지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하고 습기가 가드 차 있다. 창문 밖으로 나무에 반쯤 가려있긴 하지만 동해바다가 보인다.
"와~ 전망 좋다. 여기 텐트치자." 아래쪽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본 정성필씨가 올라오라 야단이다. 어느 산이나 전망이 좋은 위치는 하나쯤 있기 마련, 응봉산의 최고 전망대는 다름 아닌 산장 지붕이다.
숲향기 가득한 육백산 가는 길
멋진 일출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는데 밤새 비가 내렸다. 일출은 물론 볼 수 없었고 무엇보다 지독한 가스가 취재진의 발길을 묶는다. 일단 산장 안으로 후퇴, 난로에 불을 지피고 젖은 장비를 말린다. 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고, 가스도 걷히지 않는다. 부족하긴 해도 하루 분 식량 정도는 여유가 있어 날이 완전히 갠 다음날 출발하기로 한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새하얀 솜털구름들이 산 위로 피어오른다.
이튿날, 거울에 비친 듯 물과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너머로 금빛 비늘을 반짝이며 잉어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른다. 해는 무심히 시간이 되면 뜨고 지는데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걸 알까.
아침식사를 마친 후 산장 위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까지는 불과 2분 거리. 2평 남짓한 정상부는 잡목이 눈높이까지 솟아 있어 키 작은 이들은 까끔발을 해야 겨우 동해를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나마 제를 지낼 때 사용했던 작은 나무 책상 하나가 훌륭한 전망대 구실을 해준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안내판은 응봉산 고도를 1298m로 표기하고 있지만, 같은 시기 제작된 2만5천분의 1 지형도에서는 1268m로 기재돼 있다. 휴대용GPS의 고도계도 1268을 나타내고 있는 걸로 봐서는 안내판에 표기된 높이는 오류가 아닌가 싶다.
산길은 이제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비온 뒤라 숲은 한층 생기가 있다. 햇살을 받은 나무들이 피톤치드를 팍팍 뿜어낸다. 숲향에 취해 걷다보니 이틀간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다. 길은 왼쪽으로 떨어지며 문의재에서부터 취재진과 일정 간격을 두고 따라붙은 산판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육백산까지는 산판도로를 따라 가기로 한다.
이른 아침 땅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길 양옆으로 20~30m 높이의 잘생긴 참나무와 종비나무가 새벽이슬을 잎사귀 하나하나에 품고 하얗게 빛난다. 육백산 가는 길은 마교리로 내려가는 산판도로에서 벗어나 1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길은 경운기가 들어갈 정도로 좁아지고 길 위로 억센 풀이 많이 자라나 있다. 정상 가는 길 오른쪽으로 대덕산 풍력발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잘 깎아놓은 잔디밭처럼 펑퍼짐한 산비탈 위에는 기상체조라도 하듯 풍차날개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육백산 정상은 씨앗을 600섬이나 뿌릴 수 있을 만치 넓은 공터가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지만 현재는 무성한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어 씨앗 한톨 뿌릴 만한 공터도 남아 있지 않다. 정상에는 작은 식탁 크기의 책상 두 개가 있고 표지기 몇 개가 달려있다. 등산표지판까지 만들 정도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정성을 쏟는다면 정상도 조망을 할 수 있도록 잡목 정도는 벌목해야 하지 않을까.
장군목으로 되돌아온 취재진은 북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하산한다. 25분 정도 가면 만나는 사거리는 왼쪽은 무시터, 오른쪽은 임도다. 그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은 육백지맥을 잇는 길로 두리봉과 그 너머까지 이어진다. 갈림길을 지나고 1135봉을 지나 봉우리 왼편으로 허름한 묘 1기가 있는 1124봉에 닿는다. 여기서 동쪽 능선을 타고 내려야 하는데 잡목이 많고 길을 찾기 어렵다. 동쪽으로 가장 긴 능선을 잡아타고 내려가다 보면 양지바른 곳에 깔끔한 묘 1기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왼쪽 계곡으로 떨어지는 길을 만난다. 계곡으로 내려서기 위해서는 원을 그리듯 능선을 돌아 내려서야 한다.
계곡의 최상류지점으로 떨어지면 계곡 왼쪽으로 길이 뚜렷하다. 푸른 녹음과 물소리를 들으며 1시간을 내려와 산판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다시 계곡으로 내려서 20여분 가다 만나는 일자로 쭉 뻗은 포장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40여분을 내려오자 출발하면서 헤어졌던 427번 지방도와 다시 만난다.
2박3일간의 산행에 걸은 거리는 고작 15km, 비가 오면 쉬었다 가고 잠이 오면 낮잠도 자면서 자연에 순응하고 머리가 아닌 몸이 시키는대로 따르다보니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결코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현대인의 생활지침서에 나온 '시간은 돈!' 이라는 말, 돈보다 중요한 시간도 있음을 산이 알려준다.
*산행길잡이
문의재 들머리-(30분)- 폭포-(1시간10분)-임도와 만나는 곳-(40분)-응봉산장-(2분)-응봉산-(35분)-장군목-(25분)-육백산-(25분)-장군목-(25분)-갈림길-(50분)-1124봉-(1시간)-임도와 만나는 곳-(40분)-산주터 날머리
응봉산은 삼척시 도계읍 신리와 노곡면 상마읍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낙동정맥과 육백지맥의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능선 상의 최고봉이다. 육백산은 조 600섬을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고위평탄면이 생성되어 있는데 발왕산, 가리왕산, 함백산 등이 이런 지형에 해당된다.
응봉, 육백산은 쉬우면서 어려운 산이다. 두 산 모두 정상 아래까지 임도가 잘 나있어 이 길을 이용하면 쉽고 빠르게 오를 수 있다.
문의재에서 오르는 코스는 계곡을 끼고 오르는데 하늘을 뒤덮은 단풍나무로 가을 산행에 제격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계곡을 오르며 만나는 각종 야생화와 약초, 버섯 등은 색다른 볼거리다.
사람들의 발길이 흔치 않고 등산로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계곡을 다라 오르다 일단 능선에 붙으면 길 흔적이 희미하더라도 우왕좌왕하지 말고 꾸준히 올려치면 응봉산 정상에 닿는다.
응봉산 정상에는 군막사를 개조한 응봉산장이 있어 비를 피하거나 하룻밤 묵기에 좋다. 응봉산-육백산을 잇는 산판도로는 넓고 반듯하게 잘 나있고 장군목에서 돌굴을 거쳐 산주터 날머리로 이동할 때는 1124봉에서 왼쪽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그 반대편 능선을 따라 하산해야 한다. 능선상에는 물이 없으니 식수를 충분히 챙겨가야 한다.
*교통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까지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심야)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4시간 걸리며 운행요금은 17,400원. 태백에서 통리를 거쳐 너와마을 신리까지 시내버스가 하루 6회 운행된다. 청량리역에서 통리역으로 가는 기차가 하루 2회(10:00, 14:00) 있다. 통리역 부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호산, 포항, 경주행 직행버스 이용, 신리마을에서 하차한다.
태백에서 38번 국도를 타고가다 통리 방향 427번 지방도로로 들어선다. 신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오면 너와마을을 만나고 문의재터널 직전 왼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 5분 정도 올라오면 들머리를 만난다.
*잘 데와 먹을 데
산행지 근처 너와마을 민박촌(033-552-5967)을 이용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육백산장, 사금산장, 물레방아, 디딜방아 등의 이름을 가진 너와집을 본 딴 10여 채의 민박이 운영되고 있다. 태백시내 숙박시설을 이용해도 된다. 먹거리는 태백시내의 여러 식당을 이용하면 되는데 춘하추동해장국(553-474 4)의 병천순대국밥, 황태해장국 등이 맛이 좋다.
*볼거리
통리협곡과 미인폭포 미인폭포 주위에 뛰어난 미인이 남편과 같이 살다 남편이 죽자 이 폭포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전설과 절세 미인이 자신에 어울리는 완벽한 신랑감을 찾다보니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있어 이를 비관해 폭포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미인폭포 아래 통리협곡은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릴 정도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1억년 전 생성된 단층들은 공기 중 산화되어 붉은 빛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스위치백 구간으로 유명한 심포리역 주변에 있다.
태백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도계 방면으로 가다가 통리재 입구에서 427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왼쪽에 미인폭포 입구를 만난다. 지그재그로 난 산길을 따라 10여분 내려가 혜성사 앞마당을 가로지르면 높이 50여m의 웅장한 미인폭포와 통리협곡을 만날 수 있다.
너와마을 너와집은 강원도 산골 화전 마을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도계읍 신리에는 150년 된 너와집 등 세 채가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너와집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을 기와로 얹지 않고 소나무, 전나무 등 두꺼운 나무껍질이나 널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방안에 누우면 지붕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불을 때면 연기가 벽을 통해 빠져나가는 등 엉성한 듯하지만 비가 와도 나무들이 확실한 방수 효과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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