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문장대~천황봉~법주사 17km
속세를 잊게 하는 '조망의 왕'
속세를 벗어나고자 속리를 찾는다면 오산이다. 속세를 떠났다는 뜻의 속리지만 현세의 속리는 속세를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다. 경부, 영동, 중부, 중부내륙, 청원상주고속국도가 가깝게 지나 접근이 편해 사철 등산객과 관광객으로 붐비며, 산 입구에는 각종 식당과 업소 간판이 줄을 지었고 입산하려면 3,000원의 문화재관람료를 따로 내야 한다. 산에 들어가서도 콘크리트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야 겨우 흙을 밟을 수 있고 산속에도 곳곳에 매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다른 산에 비하더라도 여간해선 속세를 벗어났다고 실감하기 어려운 곳이 현세의 속리산이다.
오리숲으로 든다. 오리는 한 마리도 없다. 매표소부터 법주사까지 5리쯤 되는 숲이라 오리숲이란다. 소나무, 전나무, 참나무류 고목들이 좋은 향기로 상쾌한 아침 분위기를 낸다. 법주사에 닿기 전부터 금동미륵대불이 거대한 몸집으로 서 있는 게 보인다.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더니 경내로 들어서자 사람을 압도한다. 33m 높이의 불상으로 1939년 당시 법주사 주지 석상과 태인 갑부 김수곤의 발원으로 조각가 김복진이 불사에 착수했으나 그의 요절로 완성하지 못한 것을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완성했다. 당시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나 1980년대 중반 들어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해 철거하고 청동 160톤을 들여 청동미륵대불을 만들었다. 이어 2000년부터 불상에 금을 입히는 작업을 시작해 2002년 총 7억 원을 들여 완성했다.
100kg의 금을 발라 눈부시지만 자연스럽게 초록빛을 내는 속리산에 비하면 사치스럽고 생뚱맞다. 이에 반해 정작 대접 받아야 할 법주사의 국보나 보물은 뛰어난 예술성과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초라하다. 대불 앞에선 다들 감탄하며 기념사진을 남기지만 석연지나 쌍사자석등 같은 국보 앞은 휑하다.
미적으로 따지면 국보 55호인 팔상전이 대불보다 낫다. 한국 유일의 5층 목탑이며 각 층이 어우러져 균형미가 빼어나다.
법주사는 1970년 처음으로 입장료와 함께 문화재관람료를 통합징수했고 국립공원입장료가 폐지되었을 때도 기존 2,200원에서 3,000원으로 문화재관람료를 인상해 등산인들로부터 원성을 샀던 곳이다.
우기가 지난 저수지는 물을 가득 머금어 여유롭다. 저수지로 이어진 계곡 위로 태평교가 나 있고 다리 아래 물가엔 갈겨니를 비롯한 민물고기들이 바글댄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만 몰려 있는 걸로 봐서 사람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고기 떼일 테다. 담소를 나누며 걷는 이는 찾아가는 트레킹 스쿨의 박은주 강사다.
콘크리트 숲길을 한참 오른다. 몸과 마음을 서서히 풀며 산을 받아들이는 워밍업이다. 목욕소는 세조가 목욕하여 피부병이 나았다는 곳인데 잠깐 봐도 씻고 싶은 생각이 드는 맑고 아늑한 소다. 이어 만나는 세심정은 관광지의 여느 식당처럼 현란한 모습이지만, 그 뜻은 '현란한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 정자'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차가 다니는 콘크리트길 위에서 세속의 마음을 씻기는 쉽지 않다.
용바위골 휴게소를 지나자 반가운 흙길이다. 푹신한 흙길이 아닌데도 산을 오래 기다렸기에 발이 편안해 한다. 멍하니 걷던 발이 정성껏 산길을 맛본다. 크고 작은 바위가 섞여 있어 걸음은 불규칙적이지만 그게 오히려 정신을 집중하게 한다.
오르막이 나오는가 싶더니 보현재 휴게소다. 당장 눈앞에 의자가 널려 있으니 반갑지만 산길에 몰입했던 리듬과 기분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잠깐 쉬고 다시 산을 오르면 '마지막 휴게소' 라고 큼지막하게 쓴 냉천 휴게소다. 짧은 거리에 휴게소가 너무 많다. 진정 등산객과 산을 위한다면 공단과 협의하여 산을 떠나주는 게 도리일 테다.
방학이라 가족단위 등산객이 많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독려하고 아이들은 투정을 부리면서도 등산을 포기하지 않는다. 맨 뒤에서 어머니가 조심해서 가라며 아이들을 살핀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일생일대의 도전을 하고 있는 게다. 운동화 신은 부모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최대한 힘든 티를 감추며 아이들을 독려한다. 아마도 저 가족, 오늘 저녁쯤에는 더 끈끈해져 있을 것 같다.
주능선이 가까워질수록 계단이 가파르다. 숨소리가 커지고 몸이 뜨거워진다. 다리 근육이 아프다. 참고, 참아 오르자 탁 트인 능선이다. 쏴 하고 바람이 불어와 마사지하듯 온몸을 만진다. "아... 좋다" 하는 말이 절로 난다. 저 너른 산 풍경들... 제 아무리 잘 그린 진경산수화라 해도 이 생생한 오감을 채우진 못하리라. 오름의 고통이 고갯마루에 닿으면 즐거움이 된다.
암봉이라 문어 머리처럼 생긴 문장대를 오르자 360도 파노라마가 시작된다. 한 번에 확 둘러보면 즐거움이 줄어들기라도 할까 봐 방향을 나눠서 보고 또 본다. 관음봉을 시작으로 한 서북능선은 거칠고 힘 있게 솟아 위세가 대단하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솟은 바위들이 저리도 멋있는 조화를 이루다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시원하다. 남으로는 오늘 가야 할 능선이 주루룩 천황봉까지 줄을 섰다. 생각보다 멀지 않아 먹을 거라도 챙긴 양 맘이 든든해진다. 위에서 보니 문장대는 왕관이다. '조망의 왕'이라 해도 손색없는 바위 왕관인 게다.
마침 '운동화 가족'이 올라온다. 예상했던 각종 감탄사들이 튀어나온다. 산행 초반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먼저 올라오고 부모는 한참 뒤에야 헉헉대며 올라온다. 감격에 겨워 사진 찍고 할머니한테 전화 하고 난리다. 산꼭대기만이 줄 수 있는 순수한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잰걸음으로 바싹 능선을 걸으니 신선대 휴게소다. 나무에 가려진 암릉지대로 걸어 나가 보지만 이미 문장대의 화려한 조망을 맛본 탓인지 별 재미가 없다. 비로봉 가는 능선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시원한 바위 전망대가 있다. 문수봉 암릉 너머로 볼록 튀어나온 문장대는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띈다. 남으로는 비로봉의 암릉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이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듯싶더니 점점 짙어진다. 걸음이 빨라진다.
산길은 비로봉 바위 아래를 지난다. 거인 같은 듬직한 바위가 옆으로 서 있다. 오를 만한 데가 없나 살피지만 딱히 오를 데가 없고 절벽이 어찌나 시원한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바위는 가만히 있는데 높은 고도감과 강한 기운에 사람이 눌리는 기분이다.
비로봉 아래에는 그늘진 숲에 시커먼 석문이 기다린다. 햇살을 가린 나무와 바위 때문에 몇 미터 되지 않는 바위문은 터널처럼 어둡고 축축하다.
키 큰 나무 사이로 오르다 만난 헬기장은 장각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툭 터진 데서 땀에 젖은 옷매무새를 다잡고 깊게 숨을 삼켰다 뱉어낸다.
천황봉은 구름 속이다. 방역차가 지나간 듯 하얗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이제야 속세를 떠난 분위기가 난다. 세상과 외따로이 떨어진 분위기를 잠깐 만끽하다 왔던 길을 거슬러 상환암 쪽으로 내려선다. 내리막 중간쯤의 기막힌 바위 전망대가 배석대다. 신라 선덕여왕이 덕만공주였던 시절, 매일 아침 부왕인 진평왕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는 곳이다. 너른 바위와 소나무가 휘돌아 솟구친 멋진 전망대다. 더 아래의 은폭동폭포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땅속에서 우렁찬 물소리만 울리는 폭포라 하여 은폭이라 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은폭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은폭을 내려서니 세심정이다. 아래 물가에 지친 발을 담근다. 그러고 보니 속세의 번잡함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산행이 끝나고서야 세속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하루였음을 깨닫는다.
*법주사~문장대~천황봉~법주사 왜 명품 등산로인가?
기암괴석 아름다운 능선이 속리산의 매력, 최고 전망대는 문장대
"속리산의 매력은 한 번 와서 알기 어렵습니다. 계절별로, 코스별로 다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국립공원관리공단 속리산사무소의 홍성열(49) 계장은 보은 토박이에 속리산사무소에서만 20년을 근무했다. 속리산과는 떨어져 살아본 적이 거의 없는 속리산 사람이다. 그는 속리산의 매력을 능선에서 찾는다. 능선의 바위가 화려하고 터진 전망대가 많아 눈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절인 법주사는 속리산과 잘 어울립니다. 속리산에 왔다면 법주사를 안 보고 갈 순 없죠. 능선은 바위가 많아서 산행이 지루하지 않고 경치도 아름답습니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많아 좋고 가을에는 기암괴석과 단풍이 잘 어울립니다. 또 경업대 전망도 빼놓을 수 없고요. 속리산 최고 전망대요? 저는 문장대라고 봅니다. 서북 능선과 속리산 주능선이 시원하거든요."
홍 계장이 꼽은 속리산 베스트 코스는 법주사~세심정~문장대~비로봉~천황봉~세심정~법주사로 이어지는 원점회귀 코스다. 능선이 매력이니 개방된 능선을 다 타는 코스인 게다. 그러나 16.8km에 이르는 긴 코스이므로 초보자는 삼가는 것이 좋다.
*산행길잡이
17km로 길지만 3분의 1은 편한 임도 숲길
바위산이지만 험하지 않고 곳곳에 휴게소 많아
속리산은 속세를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이다. 산속으로 걸어들어 갈수록 자연스레 속세를 잊어버리게 하는 아름다운 힘이 있다. 그러므로 얼른 한 바퀴 휙 돌고 내려와야지 하고 생각해선 산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매표소와 법주사~세심정~보현재로 이어지는 너른 숲길 같은 데서는 오감으로 산을 맛보며 속세에 절은 맘을 씻어내는 게 알맞은 속리산 산행법이다.
법주사~문장대~천황벙~법주사로 이어진 코스는 16.8km로 당일산행으로는 제법 길다. 그러나 3분의 1은 법주사와 세심정~보현재를 잇는 너른 임도이므로 산행을 자주 한 사람이라면 힘든 코스는 아니다. 국립공원이라 길 찾기는 어려울 게 없으며 바위산이라 해도 바위 틈새로 교묘히 사람이 지나갈 길이 있어 산 아래에서 보이는 것만큼 등산로가 험하지는 않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초보자가 있을 경우에는 경업대 쪽으로 하산하는 게 능선과는 다른 경치를 즐기고 시간 소모도 줄이는 방법이다.
천황봉에서 하산할 때는 법정등산로인 상환암 길로 온 길을 되돌아가 하산한다. 지나온 길이라 해도 20분 정도만 가면 닿으므로 지겹진 않다.
하산 길에서는 배석대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전망대요, 쉼터다. 법주사부터 문장대 사이에 태평 휴게소, 세심정 휴게소, 보현재 휴게소, 냉천 휴게소가 있고 주능선 가운데쯤에는 신선대 휴게소가 있다. 법주사 매표소는 문화재관람료 3,000원을 받는다.
*교통
버스를 이용할 경우 법주사는 청주에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청주에서는 속리산행 버스가 06:40~20:4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요금은 7,500원에 1시간50분 걸린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청주행 버스가 5~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요금은 6,000원, 1시간40분 걸린다. 동서울터미널에서는 속리산행 버스(3시간30분 소요)가 1일 13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3회 있다. 속리산행 버스도 청주에 정차한다. 속리산터미널에서는 청주행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43)
문장대식당(543-3655)의 자연산 버섯전골이 좋다. 송이, 능이, 싸리, 밤버섯 등 자연산 재료를 끓여 국물 맛이 시원해 산행 후 식사와 안주로 제격이다. 문장대 오름길의 보현재 휴게소는 18세 때 이곳에 시집와 70세를 바라보는 김해룡씨가 수십 년을 운영하고 있다. 큰딸 최은주씨는 법주사 입구에서 팔도식당(544-2531)을 운영하는데 김씨가 캔 산나물과 버섯을 재료로 쓴다. 속리산숯불구이식당(543-9845)은 생목살이 맛있다. 이 외에도 법주사 입구에는 숙소와 식당이 많다. 도로를 경계로 서쪽 새마을금고 뒷골목에 숙소가 많다.
*명소
정이품송 조선 세조로부터 정이품 품계를 받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체 높은 소나무다. 수령이 6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되었다. 세조 10년(1464년)에 왕이 병에 걸려 명산대찰에 기도하러 다니던 중 법주사로 향했다. 이 소나무를 지날 때 세조가 보니 밑으로 처진 가지에 연(가마)이 걸릴 것 같아 "연 걸린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처졌던 가지가 저절로 들려 가마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는 그 자리에서 소나무에 정이품을 제수했다고 한다.
법주사 문화재관람료를 3,000원씩 받아 등산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절이지만 눈요기 삼을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팔상전인데, 이는 한국 유일의 5층 목탑이다. 국보 55호다. 그 외에도 국보 5호인 쌍사자석등, 국보 64호인 석련지, 보물 15호인 사천왕석등, 보물 216호인 마애여래의상 등 귀한 문화재들이 있다.
글쓴이:신준범 기자
참고:월간<산> 2009년 9월호
산행지도(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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