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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여행 정보

지장산.보개산(경기 포천,연천/ 강원도 철원)

by 그린 나래 2010. 12. 17.

 

보개산(寶蓋山)
옛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산에서 지장봉까지 이르는 긴 산괴를 통틀어 '보개산'이라 불렀다.
옛 보개산(寶蓋山)의 최고봉은 지금의 금학산(金鶴山,947m)이었으며, 연천군 동북쪽에서 웅장하고 준험한 자태를 자랑하며,

수많은 준봉들과 함께 솟아 있는 산이다.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연천군에서는 연천읍의 옥산리, 동막리, 통현리, 고문리,

부곡리와 신서면의 대광리, 내산리, 도신리 지역이 이 산자락에 걸친 거대한 산군으로 연천지역 산 중에 조종(祖宗)이기도 하다.

보개산 산군의 둘레만 해도 약 72Km에 이르고, 남북 25km, 동서 14km의 규모에 달한다.

 

보개산의 산군을 크게 둘로 구분하는데,  고대산에서 환희봉으로 이어지는 중심 주능선을 축으로 연천군에 해당하는 서쪽 산줄기를 내보개

(內寶盖), 동쪽지역의 철원군, 포천군 산자락을 외보개(外寶盖)라 하였으며,  연천군이 산 전체의 70%를 관할하고 있다. 외보개의 최고봉은

철원군 동송읍의 금학산(金鶴山, 947m)이고, 내보개의 최고봉은 내산리에 있는 환희봉(歡喜峰, 877.2m)으로 일명 지장봉 또는 지장산을 말

한다. 금학산은 장중하고 기품있는 골격으로 남성미를, 환희봉은 수려하게 빼어난 풍광으로 여성미를 뽐내고 있다.

 

옛 기록에 보개산 안에는 28개의 장엄한 봉우리와 36곳의 절경지가 있었고,  골짜기마다 불당이 들어서 등을 켜면, 마치 밤하늘의 별빛만큼

이나 사찰의 등불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구한말의 항일의병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불교문화재가 대부분 멸실 파손되어,  지금은 단 한 곳의

옛 절도 남아있지 못한 형편이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보개산은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탐승객과 학인, 스님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통상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보개산은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을 경계하는 해발 877.2m의 환희봉을 말하는데,  현재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지장봉으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산의 역사적 이름은 단연 보개산 환희봉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입증해주는 기록

<대동지지><대동여지지><미수기언><광무3년연천읍지><여지도서><신증동국여지승람><동람도><동여비고><동여도><팔도총도><해

동지도><경기37, 38관도><천하지도><여지도><해동도><동판수진일용방>< 동국지도><첩역지도><천하여지도책-경도도><팔도지도>

<팔도전도><해좌승람><경기고지도첩><조선전도><여도><청천집><심원사지><산경표><보개산천기도문><숙종실록><인조실록>등

서 전해지고 있다.

 

목은 '이색'이 쓴 '보개산'이란 한시와 '보개산 지장사 중수기','심원사 대종불사기','보개산 석대기','지행부록 보개산기'에서도 보개산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보개산의 다른 이름으로는 영주산, 지장산, 산내산, 법화산, 보가산, 석대산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보개산의 의미는 '보배로 가득 뒤덮인 산'이란 뜻인데, 불보살의 보배스러운 가피와 영험이 가득한 산이란 의미가 함축된 것이다.

 

이 이름이 생성된 유래를 암시해 주는 내용이 '이만부'가 지은 '지행부록 보개산기'에 자세히 전해진다.
"보개산은 동주(東州:철원의 구명)의 남쪽 4Km 되는 곳에 있으며, 그 동북쪽이 산수가 가장 울창하다. 이 곳은 예전에는 맥국의 영토였는데,

동주에 이르면  40Km나 펼쳐친 평야가 넓게 열려있고,  옛적에 궁예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를 세웠는데,   보개산이 이 평야의 남쪽을

가로막고 있다. 산은 웅장한 형세로 하늘 높이 치솟아 힘차게 달리고, 바위로 된 보배 같은 산봉우리들이 마치 가마 뚜껑을 덮어씌운 듯하다"

 

 

보개산의 다른 이름들 ~

 

< 환희봉 >
옛 기록 중 보개산의 풍광을 '보개산 석대기'가 비교적 잘 설명한 편이다.

'송도(松都·개성)에서 동쪽으로 48Km 되는 곳에 명산이 하나 있으니 보개라. 높고 험한 준봉들이 열을 지어 솟아 있고, 산림은 깊숙하고 그윽

한데, 산 중앙에 하나의 기이하고 빼어난 봉우리가 높고 우뚝하게 솟아 있으니 바로 환희봉(歡喜峰)이다.  그 봉우리 아래 1.2Km쯤에 암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석대다.’

 

내보개산의 최고봉인 환희봉과 관련된 옛 기록은 미수 허목의 '고양산수기'에도 나타난다.
'내가 일찍이 보개산 환희령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고적이 있었다'가 그 것이다.  이처럼 환희봉은 민지가 석대에서 지장진신

의 체현을 감동적으로 목격하고는 환희심이 절로 일어나 불사를 일으켰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현재 국립지리원 지형도에는 화인

으로 기록되어 일제 때에 생겨난 엉뚱한 산이름으로 여지껏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영주산 >
'영주산'이란 이름은 이 산 안에 있었던 가장 큰 사찰의 기록인 '심원사지'에서 전해지고 있다.

본래 이름은 영주산(靈珠山)이었으나, 1396년(조선 태조6년) 무학왕사가 심원사주지로 주석하면서 산이름을 보개산으로 개칭했다고 <실록>

에 전해지고 있다. '영주산'이란 이름은 '영주사'라는 사찰이름에서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심원사의 옛이름이 '영주사'였을 것이다.

 

< 지장산 >
지장봉(地藏峰), 또는 지장산이란 이름이 생성된 유래는 고려 충렬왕 33년(1307년)에 '민지'가 쓴 '보개산 석대기'에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옛적에 풍악도인으로 숭앙받던 문일장노는 세상에서 견성득도(見性得道)한 사람이라 칭송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중국 강소성의 여산 경복

사에 있을 때 장노가 여러 문도와 나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에 3산이 있는데 이 3산에 머무르면  영구히 삼악도(三惡途, 악

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인 지옥, 아귀, 축생도를 말함)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3산은 보개산, 풍악산, 오대산이다 !’

 

나는 그 말을 진실로 믿었다.  그리하여 두세 도반과 더불어 여러 명산을 두루 편렵하고 답사한 끝에  이 보개산 심원사에 들어와  환희봉을

바라보니,  봉우리 아래로 상서로운 빛이 마치 촛불을 하늘에 켜 놓은 것 같이 서기가 하늘에 가득하고 다사로운 바람이 훈훈이 일어나더니

불보살 형상의 구름이 화려하게 피어오르고 종소리는 은은하게 구름 밖으로 울러퍼지는 것이 아닌가.나는 마음에 가득 희열을 느껴서 급히

그 곳으로 가서 보니 지장석상이 화현(化現)하여 영응을 보이시는 것이었다.나는 신령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여 성재(聖齋)를 베풀려고 샘물

로 쌀을 씻고, 마지(부처님에게 올리는 밥)를 올리려할 때 지장석상이 큰 형체로 변하며 자비롭고 밝은 빛을 산하 대지에 두루 비치는 찬연

한 광경을 뚜렷이 보았다. 나는 놀라서 불식불언(不食不言)하며 입정삼매(入定三昧)의 경지에 들어 삼일을 지냈다.이러한 일로 미루어보건

대 보개산 전체는 지장진신(地藏眞身)이 항상 머물며 설법하는 곳이다.'

 

'민지'의 이 '보개산 석대기'가 영험한 이야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장보살(地藏)이 현신한 기도처'라는 의미로 지장산

이라고 불려지게 된 것이다.지장신앙의 영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깊었으면 훗날 실제로 지장사라는 사찰까지 보개산 자락에 들어설 정도

였을까?  환희봉을 지장봉이란 이름으로 바뀐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지지자료><근세조선지형도>에서 최초로 보이는데, 이를

국립지리원이 지형도에 검증 없이 옮겨 기록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혼동을 주게 되었다.

 

< 산내산 >
산내산(山內山)은 말 그대로 '산 속의 산'이란 의미이니까 곧 보개산이 첩첩산중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서 온 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향명으로 전해지고 있는 산내산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지명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內山里) 마을이 바로
그 현장이다. 이 곳은 본래 조선조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으로, 험준한 보개산의 산 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내산리라고 불렸던 것인

데, 조선 철종 10년(1859년)에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이 면으로 편입된 곳이다.

 

< 법화산 >
법화산(法華山)은 법화골(法華洞)에 있던 법화사가 있던 곳이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법화사는 연천 지역 의병이 병참기지 삼아 은신하면서 항일구국의 대의 아래 분전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구한말(1907년)에 보개산 골

짜기에서 벌어진 의병 300여 명과 일본군 토벌대 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비록 의병이 처참하게 패전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거룩한 충

의와 기개는 보개산의 산기운을 더욱 맑게 한다.

 

 <보가산 >
보가산은 보가산성 등의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보개산의 산이름을 정확하게 숙지하지 못한 기록자가 오기한 향명이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석대산 >

월간 산 1984년 7월호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 산은 우선 그 이름에서 불교의 지장보살과 관련된 듯하여 종교적 냄새가 풍기고,  또 봉이라 하였으니  어느 산에 딸린 하나의 봉우리를

연상케 한다.  주민의 말에 따르면, 화전민터에 석대절이 있었으며,  본래 이 산은 석대산(石臺山)으로서 그 대표적인 봉우리를 석대봉이라

했다가 지장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심원사 >
산내 최고 고찰 심원사는 보개산 내의 최대 고찰이며 이 산의 상징이었던 심원사는 역대 왕실(중궁전)의 지원을 받으며 원찰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376년(고려 우왕 3년)에 지은 <보개산 지장사중수기>와 <인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