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구간 : 화령재~산불감시초소~봉황산(740.8m)~459봉~비재~510봉~조망바위~억시기 갈림길~못재~헬기장~갈령 삼거리~갈령(49번지방도로)(13.05km)(4H52)
[화령재] 320m
백두대간 1,425km 중 상주 구간은 69.5km이며 화령은 고려 때 이곳 일대를 관할하던 화령현(化寧縣)의 지명이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여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조령, 남으로 추풍령과 연하여 화령으로 불려 왔다고 전한다. 신라 때는 연비군(蓮匕郡), 경덕왕 때에는 화령군(化寧郡), 화령이란 지명은 고개 이름인 火嶺에서 연유된다. 고려 때에는 화령현으로 지금은 화서면이다. 북쪽은 봉황산을 거쳐 속리산 문장대로 남쪽은 국수봉으로 이어지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화령재는 火嶺으로 표기하는데 옛지명은 化寧이다. 火嶺이란 이름에 대해선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많이 일어난 국경지역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시 여겼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6.25때에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여 불火자를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는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 부른다 한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으며 지금도 상주에서는 옛날의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중화 (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達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봉황산] 704.8m
봉황산은 말 그대로 봉황이 살았다는 유래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전설에 의하면 1300년전에 봉황이 한 30년 정도 살았단다. 또한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일설에는 봉황산 장군이 싸움에 이겨서 봉황산, 반면 싸움에 진 장군이 있는 산은 원통산(596.9m)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 봉황산과 구병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峰)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峯)산,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峯)산은 구봉(峰)산(=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싸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 「산경표」에도 남는다.
[비재] 427m
비재는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재, 비조령이라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 비재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한다.
[못제]
비재에서 갈령 삼거리 가는 길에는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습지인 못제가 있다. 못제의 크기는 300-500평 정도, 10평 정도의 넓이에 물이 고이는데 유입수는 없고 빗물에 의해서만 못이 생기기 때문에 실제 물을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지도상에는 식수표시가 되어 있지만 사실 여름 장마철에만 물을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은 못제가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다고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제 전설_삼국유사(일연지음/권순형편역/출판타임기획)>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장군과 매일 싸움을 벌여 이겼다. 싸움을 벌이는 족족 패하는 황충이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비밀리에 캐내어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풀었다. 그러자 견훤의 힘은 사라졌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했다. 이는, 광주의 한 처녀가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얘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산(해발 873m인 두루봉을 상주시 화서면 청계 마을 사람들이 대궐터라고 부르는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임.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청계산이라 함.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임)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이 모두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였던 견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갈령 삼거리]
형제봉 오르는 중에 1Km 떨어진 곳의 '갈령'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갈령은 '칡고개'라는 뜻이다.
[형제봉] 832m
형제봉은 서쪽 골짜기속에 십승지 중의 하나인 만수동을 감싸고 있다. 십승지는 옛부터 전란과 재앙이 비켜간다는 곳으로 대부분 오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공주의 유구와 마곡, 부안의 변산, 안동의 춘양, 성주의 만수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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