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재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의 늘티마을과 귀빈래 마을쪽을 넘나드는 낮은 고개다. 이 고개는 속리산에서 내려와 청화산으로 기운을 다시 뽑아 올리는 허리부분으로 청화산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늘재 고개를 가로질러 992번 지방도가 2차선으로 잘 포장되어 있으며, 고개 북쪽 방향으로는 100여m 거리에 유리온실에서 청정채소를 재배하는 ‘청화산농원’이 있고 조금 아래에는 이 농원의 채소를 이용한 ‘청화산쉼터’ 식당이 있다. 고갯마루에는 수령 320년이나 된 아름드리 엄나무가 백두대간의 역사를 안고 묵묵히 서 있다. 늘재는 청화산을 오르는 들머리로 청화산농원 저온창고 앞에는 차를 10여대 이상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이용에 편리하다. 또한 식수를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 창고 옆 수도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이 고개를 가로 질러 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북쪽으로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대야산, 둔덕산, 촛대봉, 곰넘이봉, 장성봉, 용추계곡, 선유동계곡 등과 충북의 괴산군으로 통해 국도와 접속된다. 남으로는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보은군, 청주시 등지와 연결돼 접근성이 편리하다. | |||
갓바위재는 청화산과 조항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 솟아있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지난날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오가던 고갯길이다. 갓바위재에서는 삼송리의 의상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 충북쪽에 있는 삼송리는 원래 문경군 가은면에 속해있던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문경군 농암면에 속했다가 1962년 주민들이 농암면까지 오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 불편을 호소해옴에 따라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 갓바위재와 대야산, 조항산 사이의 고모치는 삼송리가 충북지역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삼송리에서 이 고개들을 넘어 농암면의 궁기리를 거쳐서 농암면 소재지로 가는 통로였었다. 당시는 갓바위재보다는 옆에 있는 고모치를 주로 많이 이용했으나 지금은 고모치로 넘던 길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지 않아 풀밭으로 변했고, 갓바위재길은 의상저수지에서 오르는 등산객들이 자주 이용하여 그나마 옛길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농암면 궁기1리에서 백두대간을 오르면 갓바위재이고, 궁기2리로 오르면 고모치가 나온다. 농암면 궁기리(宮基里)는 궁터라하여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이 이곳에서 많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던 곳으로 마을은 상궁·중궁·하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 이웃하는 연천리에는 말바위란 곳이 있어 견훤이 이곳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말과 활쏘기로 빠르기 내기를 하여 아차라는 마을까지 달려 갔을 때 말은 도착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아 화살보다 말이 늦게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여 말의 목을 베는 순간 화살이 견훤의 앞에 떨어져 아차 준마를 잃었구나 후회 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을 비롯해 석탄박물관이 있는 가은읍 갈전리 금하굴은 견훤의 출생설화가 있는 곳으로 견훤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 |||
고모치는 대야산과 조항산사이에 있는 고개다. 이 고개 역시 갓바위재와 마찬가지로 백두대간의 높은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삼송리 주민들이 농암을 오갈 때 이용하던 고개다. 지금은 그 이용할 필요가 전혀 없어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없다. 다만 봄철 산나물을 뜯는 주민들만이 간간이 오갈 뿐이다. 고모치 고갯마루에는 원형이 대체로 잘 남아있는 전형적인 서낭당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개는 지금 당시에 사람들이 오가며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던 돌무더기와 한그루의 당목이 남아 있다. 서낭당의 고갯마루길은 어른이 서면 어깨높이 만큼 묻히는 깊은 V자형 좁은 길로 고갯마루까지 S자형으로 연결돼 있다. 서낭당에 이르는 고모치 고갯길은 다른 곳에서는 그 모습을 찾기 힘든 옛 고갯길의 모습을 고스란히 잘 간직하고 있다. 고모치의 서낭당은 이 고갯길을 주로 이용하던 삼송리 마을 사람들이 관리를 했고, 궁기리쪽에 서 관리를 하던 서낭당은 고모치광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고모치의 서낭당은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고 돌보는 사람들이 없어 수풀속에 묻혀 있었는데 오히려 옛 모습을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고모치와 관련된 옛 얘기가 궁기리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옛날 궁기리에 살던 고모가 삼송리에 사는 조카에게 갔다가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되돌아갔다. 때는 겨울철이라 마침 폭설이 내리고 엄청난 추운 날씨였다. 고모가 떠나고 폭설이 내리자 조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늦은 밤길과 추운 겨울날씨속에 재를 넘어간 고모가 걱정이 되어 고갯길을 뒤따라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고모는 고모치 고갯마루의 서낭당 근처에서 탈진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 고모의 조카는 고모를 부축하여 함께 고개를 내려가려고 시도를 했으나 심한 폭설과 추위에 견디다 못해 둘 다 얼어죽었다는 안타까운 얘기가 전하고 있다. 고모치에 얽힌 이 전설은 고모치의 ‘고모’라는 말에서 근거하여 당시 삼송리나 궁기리 사람들이 이 험한 고개를 넘으면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이처럼 지명에 얽힌 얘기는 이곳말고도 수없이 많이 전해오고 또 만들어지곤 한다. 고모치의 어원을 보면 비슷하게 전해오는 이름으로 고치, 고치령,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치나 고치령은 높고 험하다는 뜻인 고치(高峙)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은 ‘곰 고개’‘곰의 고개’라는 개념으로 분류되어 때로 응치(雄峙)로 변천하기도 하는 이름이다. | |||
밀재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용추계곡을 끼고 대야산 오르는 등산로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농바위, 희양골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의 고개로 지난날 문경 완장리와 충북 삼송리 주민들이 오가던 길인데 양쪽 모두 오르는 길이 잘 나 있다. 밀재는 마귀할미통시바위와 대야산 사이의 고개로 문경, 괴산쪽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백두대간 조항산-대야산 양 방향 길이 만나는 네 갈래로 난 고개로 등산객들의 내왕이 많은 곳이다. 훤히 트인 고갯마루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들어서 있어 간식을 하거나 쉬어가는 곳으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밀재에는 철재로 만든 오래된 방향표지판이 서 있어 길 찾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 대야산은 거의가 문경 완장리에서 오르는데 용추주차장에서 상가와 식당을 겉쳐 용추계곡을 따라 월영대에 도착하면 두 갈래 길이 나 있어 왼쪽으로는 다래골로 밀재를 지나 대야산 정상으로 오르게 되고, 또 다른 대야산 정상 오르는 길은 월영대에서 피아골을 거쳐 대야산 정상에 오르는 길로 산행의 순서로 보아 경사가 완만한 밀재길로 올라 내려올 때는 피아골로 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
촛대재는 대야산과 촛대봉 사이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고개다. 이 고개는 다른 고개처럼 높은 능선상의 통행로로 이용하는 고개는 아니며 대야산을 내려올 때 피아골로 내려서는 갈림길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대야산에서 곰넘이봉쪽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내리막길을 밀려 내려오면 경사가 잠시 완만해지는 곳으로 나무그늘에 앉아 오른쪽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한 숨 돌리기에 좋은 곳이다. 촛대봉과 곰넘이봉을 넘지 않고 탈출하려면 고개 왼쪽으로는 난 길을 따라가면 상관평쪽 922번 지방도 2차선 포장도로가 나온다. 촛대봉 오른쪽 급경사지 100여m 아래에는 대야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흐르는 물이 있으나 식수가 없어 급할 때가 아니면 거의가 이용을 하지 않는다. | |||
불란치재는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에 있는 고개로 버리미기재를 넘는 922번 2차선 포장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문경의 가은읍 완장리와 충북 괴산의 청천면 관평리를 이어주던 옛길로 통행량이 제법 많았던 고개다. 상주 화북의 늘재를 넘어 청천과 괴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남북방향이라면, 문경 가은에서 불란치재를 넘어 청천과 청주로 이어지는 길은 동서로 난 방향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면서 늘재가 992번 지방도로로 포장되어 여전히 쓰임새를 갖춘 반면, 불란치재는 버리미기재에 922번 포장도로를 넘겨주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길이 되고 말았다. 불란치재는 지금도 뚜렷한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통행은 거의 없다. 불란치재와 버리미기재는 사람들이 걸어다니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변천과정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곳이 바로 문경지방의 고갯길이다. 그 중 계립령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새재(조령)는 조선시대에, 이화령은 일제시대 이후에 각각 그 역할을 담당해 온 고개들로 한 곳에서 역사의 흐름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불란치재는 옛 문헌에는 불한령(弗寒嶺), 불원치(佛院峙), 불한현(弗寒峴)으로 기록돼 있으며, 대야산의 허리로 괴산 경계에 이른다고 적혀있다. 뜻을 풀어보면 춥지 않은 고개라는 의미로 이곳의 지형을 보면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의 깊은 계곡길로 두 봉우리 양쪽으로는 다시 대야산과 장성봉이 가로막고 있어 한겨울 찬 바람에도 포근하다고 하여 불한령으로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또 불란치재는 ‘불이 났던 고개’라는 뜻으로 전해지고 있다. | |||
버리미기재는 곰넘이봉과 장성봉 사이의 고개로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속한 곳으로 922번 지방도(2차선 포장도로)가 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 백두대간 마룻금이 지나는 이 고개는 장성봉 산행 시작점으로 2, 3대의 주차공간이 있고 고개 바로 옆에는 장성봉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버리미기재는 불란치재의 역할을 넘겨받아 새로 닦은 2차선이 잘 포장돼 있는데, 그 이름은 ‘벌의 목 고개’라는 뜻으로 밀치, 밀재, 밀목치, 밀목재, 밀항 등과 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갯길의 경우 벌, 노루, 소, 돼지, 닭 같은 짐승의 목 부분에 빗대어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 |||
은티재는 악희봉과 구왕봉 사이의 고개로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를 나누고 있다. 이 은티재에서는 봉암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봉암사 산문이 폐쇄되어 통행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고갯마루에 출입을 통제하는 안내문이 서 있다. 이 고개에서 주진리 은티마을쪽으로도 길이 잘 나 있으며, 산행길로 이용되고 있다. 은티마을에는 민박과 식당이 있어 오가는 길에 이용하기에 편리하다. 은티마을에서는 정월에 고갯마루의 서낭당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은티는 본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周榛里)의 한 마을 이름이다. 마을에서는 백두대간의 고개인 은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옛 지도에 은티재는 주현(周峴)으로 나오는데 옛날에는 은티마을을 주티동 또는 주치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주진리는 주치동(周峙洞)과 진촌(榛村)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은티는 주진리 은티마을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오봉정마을로 가는 고개이다. 그래서 한때 이 고개를 오봉정고개라 부르기도 했다. 은티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은티마을 유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은티마을은 연풍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東은 중리부락, 北은 심풍리, 南은 경북 가은에 접하고 있고,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연풍현 당시 현내면 인지동에 속해 있었으며, 1812년 작성된 동절목(洞節目)에는 인지동 의인촌리(義人村里)로 기록,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 왜인들이 義人은 한국의 민족정신이 함유되었다 하여 은티(銀峙)로 개칭,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周峙洞, 榛村, 鷹岩, 鳥峰, 中里를 병합, 주치와 진촌의 이름을 따서 주진리라 하였으며, 8.15 광복 후 행정구역 세분화에 따라 주진리를 3개 마을로 나눠 그중 우리마을을 은티라 칭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은티는 女宮穴에 자리하고 있어 동구에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물체를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동구 송림안에 남근석(男根石)을 세워놓고 매년 정월 초 이튿날을 정제일로 마을의 평안과 동민가족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燒紙를 올리며 祭가 끝나면 한자리에 모여 음복하고 제물을 나눠먹는 동고사를 지내고 있다. 서기 1996년 6월 20일. 은티마을 동민일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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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티재는 구왕봉과 희양산 사이에 위치하며,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의 경계를 이룬다. 주진리 은티마을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잘 나 있으나 봉암사쪽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고갯마루에는 서낭당이 있으며 은티마을에서는 매년 정월에 제사를 지내고 관리를 하고 있다. 지름티재는 은티마을에서 봉암사로 갈 때 질러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데, 전혀 의미가 다른 유치(油峙)로 변천되어 쓰이기도 한다. 이 고개 역시 봉암사의 산문폐쇄로 봉암사로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서낭당은 서낭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돌담을 쌓아올린 제단으로 돌담 높이는 30~50㎝이다. | |||
사다리재는 이만봉에서 백화산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고개로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한밤미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분적골) 사람들이 오가던 곳이다. 사다리재란 이름의 연원은 잘 알 수 없으며, 일대가 고사리밭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미전치(薇田峙)라고도 한다. 고사리밭등은 분적골 사람들이 이곳에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 미전치(薇田峙)라 한다. 이 고개는 이만봉쪽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가은쪽은 옛길을 알아불 수 없을 정도로 자연림으로 되돌아 간 상태다. | |||
평전치(平田峙)는 사다리재와 백화산 사이의 재로 백화산 정상까지는 약 50분거리다. 이 재는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한실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흰드뫼가 접해 있으며,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평밭등이다. 이곳 역시 분적골에서 마성면 상내리쪽으로 넘어가던 옛 고개였으나 지금은 다니지 않게 되었고, 분적골에서 평밭등까지는 산판 임도가 있으나 사용하지 않아 폐도가 된 상태다. | |||
이화령(梨花嶺)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잇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해발 548m 높이의 고갯길이다. 2차선으로 잘 포장된 이화령 고개를 이곳에서는 이우릿재로 불러왔으며, 옛 문헌을 보면 이화령은 이화현(伊火峴), 이화이현(伊火伊峴)으로 적고 있다. 1400년대에 작성된 고려사지리지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전하는 옛 기록물에는 계속해서 이화현이나 이화이현으로 남아 있는데 일제때 신작로가 나면서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란 엉뚱한 이름이 지금은 터를 잡고 사람들의 입속에 굳어져 가고 있다. 문경지방에는 지난날 “새재로 갈까, 이우리로 갈까”하는 노랫말이 있었다. 길이 험해 혹 산짐승의 피해라도 입을까, 이우리재는 이처럼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 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시대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가했던 이곳 노인들은 일대에 돌배나무가 있어 봄이면 배꽃이 피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 이화령, 이우릿재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이화현은 언제 이 길이 개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새재보다 오히려 더 오래 되었을 지도 모른다. 관음리쪽의 계립령이 주통로로 이용될 당시 이쪽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통행로가 있었을 것이고, 또 각서리에 요광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길을 새로 닦았다고 하며, 이후 2차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으로 큰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 이화령터널 개통으로 이 길의 쓰임새는 줄고 있으나 드라이브코스로 옛 추억을 더듬어 이 고갯길을 넘는 차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이화령 고갯마루 충북쪽에는 도로변 휴게소가 있고, 문경쪽 조령산 산행 들머리에는 쉼터인 파고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 |||
백두대간의 큰 줄기가 힘차게 지나가는 조령의 고갯마루. 조령은 탄항산과 마패봉 사이에 있으며, 문경새재도립공원 구역 안에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과 경계를 이루는 조령관은 비가 올 때 용마루에서 남쪽 기왓골을 타면 흘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가 남해로 빠지고, 북쪽 기왓골을 타면 한강으로 접어들어 서해로 유입된다. 조령에 올라 조령관 지붕을 쳐다보며 이 작은 자연의 이치를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조그마한 틈새가 궁극에 가서는 천양지차로 벌어진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맛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영성(嶺城)으로도 불렸던 조령관(鳥嶺關)은 새재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성의 모양새로 보아 북쪽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선조 초에 쌓고 숙종 34년(1708)에 중창했다. 1907년 항일의병전 때 일제에 의해 누각은 불타고 훼손돼 육축(陸築)만 있던 것을 1976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는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문경현편」에 초점(草岾)이라고 기록돼 있으며, 여기에는 “현의 서쪽으로 19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험한 길이 7리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새재길은 조선조태종 때에 개척되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가장 중요한 통행로이며 고갯길의 대명사로 그 명성을 지켜왔다. 새재의 어원은 현재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는데 ① 새들도 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 ② 억새가 많이 우거진 고개 ③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샛길이라는 의미 ④ 삼국시대부터 가장 큰 길로 내려오는 관음리의 계립령을 버리고 상초리쪽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새(新)길이라는 의미 ⑤ 계립령과 이우릿재 사이의 고개라는 의미 등 여러 가지로 해석을 늘어놓고 있다. 이 가운데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닦은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많다. 조령관 왼쪽에는 물맛이 그만인 백수령천(百壽靈泉), `조령약수'가 있다. 이 약수는 조선 숙종 34년에 조령성을 구축시 발견한 약수이며,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로 향하면서 한양으로 향할 때는 새로운 다짐과 각오로, 금의환향 할 때는 안도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 감로수(甘露水)를 마시면서 갈증과 피로를 달랬던 것이다. 조령관 왼편 약수터 위에는 산신각이 있다. 이곳에는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령이 모셔져 있는데 작게는 문경새재를 지키는 산신으로서, 넓게는 영남 땅을 지키는 산신으로 그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은 산신각에 들러 소원을 비는 등 공을 들이는 이가 많다. 조령관 오른쪽에는 군막터가 있다. 이곳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였던 곳으로 전해지며, 지금도 그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당시 이곳을 지키던 군사들의 함성이 아직도 메아리쳐 오는 것 같이 느껴진다. | |||
평천재는 부봉과 탄항산 사이의 고개로 월항재라고도 부른다. 이 고개는 문경시 문경읍 평천2리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지금도 가느다란 길이 나 있어 봄에 나물을 뜯는 길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다. | |||
사연많은 백두대간 두 고개 신라의 육상교통로 계립령(계립령 그 이름의 변화, 계립령, 계립령로의 개척시기, 5~6세기 신라·고구려의 전쟁과 계립령, 불교문화 전파와 계립령) 한국의 대표 고개 기행 | |||
늘재는 백두대간의 탄항산과 포암산 사이에 있으며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를 연결하는 옛 고갯길이다. 경북쪽은 고갯마루까지 민가가 있으므로 아스팔트로 2차선 포장이 되어 있고, 충북쪽은 원악산 국립공원 지역이므로 비포장 오솔길이 잘 보전되어 있다. 본래 삼국시대부터 문경새재가 개척되기 전까지 백두대간 동서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로 쓰이던 고개였는데 요즈음은 하늘재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하늘재란 이름은 문헌상의 기록에는 없으며 일대 주민들이 60~70년대 포장이 되지 않아 오지였던 이곳의 고개가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본다.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보면 아달라이사금 3년의 여름 4월에 계립령길을 열었다고 되어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인데 인접해 있는 죽령길 보다 2년이나 먼저 길을 개척해 통행을 했다. 또 삼국사기의 열전 - 김유신조에는 마목현(麻木峴)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고구려의 보장왕은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고구려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원병을 보내주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의 열전 - 온달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로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고종 42년(1255) 10월에 몽고의 장수인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만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고 한다거나 속칭 마골산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관음원이 계립령 아래에 있다는 기록도 있다. 하늘재길은 문경새재길이 개척되면서 사용 빈도가 점차 축소되어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로 변해있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경북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와 지역의 특산물, 곡물을 지개에 지고 하늘재와 충북의 닷돈재를 넘어 제천시 한수면의 황강나루에서 소금 등과 물물교역을 했다는 옛 노인들의 증언이다. 신라시대부터 이 일대 백두대간 고갯길을 넘는 곳으로는 동쪽에 죽령길이 있고, 서쪽에는 상주와 보은 사이의 화령길, 중간은 계립령길이다. 계립령로는 문경의 동쪽 계류인 신북천(身北川)을 따라 포암산으로 오르는 길목의 당포리 - 용연리 - 갈평리 - 관음리의 황정, 사점, 관음, 포암 마을을 지나 대간의 주능선이며 경북과 충북의 도계지점인 해발 525m의 하늘재를 넘는 길이다. 하늘재를 넘어면 충북쪽으로 미륵리 - 송계리 - 역리 - 황강나루로 이어져 충주를 지나 서울로 향하게 된다. 계립령은 삼국사기에는 마목현(麻木峴), 마골점(麻骨岾), 마골산(麻骨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라는 명칭으로 되어있다. 대원령은 지금의 하늘재에고 마목현, 마골점, 마골산 등은 미륵리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속칭 지릅재를 지칭하는데, 하늘재와 지릅재는 중간쯤에 미륵리 마을의 분지가 약간 있을 뿐으로 크게 보면 하나의 고갯길이라 할 수 있다. | |||
관음재는 포암산과 838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문경시 문경읍 관음1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문경 관음리쪽은 경사가 급해서 길이 나 있지 않고 미륵리쪽으로 길이 있다.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이다. | |||
부리기재는 대미산 정상에서 포암산 방향으로 4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와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와의 경계를 이룬다. 대미산을 오를 때 문경읍 중평리 박마를 통해 부리기재를 거쳐 정상에 이르거나, 아니면 보통은 중평리 여우목 마을을 거쳐 대미산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의 두 가지가 있으며 어디로 가든지 길이 잘 나 있고 무난한 코스라 하겠다. 덕산면 방향은 희미한 길이 있으나 용하구곡의 긴 계곡이 있고 길이 멀어 잘 이용을 하지 않는다. 이 고개 역시 옛날에는 이곳 중평리와 월악리 주민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이었으나 지금은 등산로로서 그 기능을 유지할 뿐으로 나물을 캐는 통행로로 이용되기도 한다 | |||
차갓재는 작은차갓재에서 대미산 방향으로 15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고개는 문경시 동로면 생달2리(안생달, 안산다리)와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를 잇는 이용도가 높은 고개다. 생달리쪽으로는 많이 이용을 하고 있으나 명전리쪽은 잘 이용하지 않지만 길은 잘 나 있다. 백두대간 길을 가다가 생달리로 내려오는 길로 자주 이용하며, 옆에 있는 헬기장이 있는 작은차갓재를 통해서도 생달리로 빠지기도 한다. 생달리까지 내려가는데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 |||
작은차갓재 역시 차갓재와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같은 용도로 사용이 되고 있다. 문경시 동로면 생달2리(안생달, 안산다리)와 동로면 명전리를 잇는 고개다. 생달리에서 황장산을 오르는 첫 번째 고갯길로 이곳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장소다. 안생달에서 작은차갓재 오르는데는 약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 |||
황장재는 감투봉과 치마바위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와 동로면 명전리를 잇는 길이다. 이 고개는 생달리의 동로초등학교생달분교(폐교)와 명전리의 문안골로 이어지는 길로 등산로가 잘 나 있다. 문안골쪽으로는 오르는 길에 고려시대에 자연석으로 쌓았다는 작성이 남아 있다. 생달리 토사골쪽은 수리봉이 있으며 리지가 형성돼 암벽훈련 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 |||
치마바위와 벌재 사이의 고개 | |||
59번 국도가 동로면 소재지를 지나 벌재를 통과하며 단양쪽으로 연결된다. 2차선으로 잘 포장이 돼 있으며, 백두대간이 황장산에서 이 고갯마루를 건너 문복대로 이어진다. 고개 정상에서 단양쪽으로 500m 거리에 `황장산 약수터'가 있으며 이 약수는 일년내 마르지 않고 물맛도 좋다. 약수터에는 쉴 수 있는 공간인 파고라와 화장실이 있고, 이동매점(?)이 있어 요기도 할 수 있다. 비가 와서 가물지 않을 때에는 벌재 고갯마루에서 단양쪽 10여m 거리에 계곡수가 흐르고 있어 식수로 사용하면 된다. | |||
문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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