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용진리, 삼기면 연동리, 낭산면
◈ 미륵산(彌勒山 430.1m)은 고대 삼한시대 백제국과 합쳐져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국 이라는 큰문명을 이룬다. 그 큰 문명의 중심에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국 미륵신앙의 큰 본산이랄수 있는 곳이다. 3세기 이후 가야에서 유입된 철기로 인해 백제는 큰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서 서울의 위례지역에 자리한 후 마한을 통합해 백제를 만들며 그 기틀을 형성한곳이 이곳 익산지방이 되는셈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회두 되어 전해져 내려오는곳이 바로 이곳 미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이다.
산행은 금마면에 위치한 용진리 전북과학고등학교 입구에서 시작한다. 미륵산은 크고높은 노송들이 위엄을 지키며 등산로 주변에 도열해 있다. 등산로에서 5분정도 진행하면 사자암에 도착할수 있다. 백제시대때부터 있어 왔다는 이 절터의 암자는 금산사의 말사로 미륵사 창건의 계기가 된곳이라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과 선화(왕비)가 사자사로 행차하던도중에 용화산 아래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여 그 인연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선화공주의 설화에도 등장하는 사자암(獅子庵)을 둘러 보고 되돌아 나와 다시금 등산로로 접어든다. 사자암은 임진왜란의 화를 입어 다 불타버리고 지금의 대웅전은 근래에 건축된 것이다.
남쪽의 조망이 좋은 이곳의 암릉지대에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한반도의 지형을 닮은 금마저수지와 용화산 끝자락의 채석장, 미륵산 정상부의 방송수신탑, 미륵사지의 모습이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미륵사지 좌측의 동탑과 서쪽의 건물에는 복원중인 서탑이 존재한다.
미륵산 정상 헬기장을 끼고 둥글게 산을 둘러서 산성이 존재한다. 미륵산성은 최고봉인 장군봉과 동쪽계곡을 둘러 막은 석성으로 기준성 또는 백제 무왕때 창건된 성으로 전해지는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엔 고조선왕 준이 금마땅에 이르러 성을 쌓고 마한을 개국 했다라고 해서 기준성으로 도 불린다.
한창 복원중인 미륵산성길을 따라 진행하다보면 아직 복원되지 아니한 과거의 석성 흔적도 만날수 있었다. 미륵산 정상 헬기장 옆엔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석성을 복원중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한다. 정상에서는 만경평야의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륵산 정상표지석은 없고 이정표(기양리연못 2.41km, 약수터 0.99km, 심곡사 0.6km, 아리랑고개 1.5km)에 시계와 거울을 달아 놓았다.
미륵사지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전망대에서 한참을 내려서면 석문과 바위쉼터가 나오고 뚜렷하고 선명한 산길을 따라 진행하면 냉정약수터 갈림길(전북 과학고↗, 미륵사지↘)이 나온다. 우측의 미륵사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미륵사지는 철망으로 빙 둘러쳐져 있다. 입구는 한참 아랫쪽이기에 수로를 따라 내려가다 개구멍으로 미륵사지 안으로 들어선 후 과학고 앞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면 된다.
◐ 미륵사지→냉정약수터→정상→사자암→구룡마을→구룡주차장→종평마을→버스정류장 (3시간 30분)
◐ 전북과학고등학교→사자암→전망바위→미륵산성→정상→냉정약수터→미륵사지→전북과학고등학교 (3시간 30분)
서동요(薯童謠)와 백제 무왕(武王)의 탄생 :
백제의 무왕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그 어머니는 서울(부여)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못의 龍과 성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그는 재기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또 그는 마(麻)를 캐어 팔아서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서동(薯童)이라고 불렀다.』 서동은 또 마동(麻童)이라고도 했고 그냥 맛동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신동국여지승람"에서는 그 못이 익산 오금산(五金山)의 마룡지(馬龍池)라고 하였다. 그러면 용으로 묘사된 서동의 아비는 누구일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은 글 끝에 "삼국사기에서는 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그렇다면 법왕이 왕자시절 미륵산에 드나들면서 서동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여 낳은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 해석이 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서동이 성장한 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麻)를 갖고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하나 짓고 아이들을 꼬여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라벌에 퍼져 대궐까지 알려지니 백관들이 임금에게 강력히 주장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가게 하였다.』
그래서 집을 쫒겨난 선화공주는 서동을 만나 情을 통하고 부부가 되었으며 공주가 떠날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황금 한 말을 서동에게 보여주자, 서동이 麻를 캘 때 그런 황금을 많이 보았던 것이 기억났고, 이를 용화산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통력을 빌어 서라벌의 장인에게 보내니 진평왕이 서동을 좋아하게 되어 편지로 안부를 자주 물었고, 끝내는 서동이 백성의 인심을 억어 무왕(武王)이 되었다.
최근 미륵사지의 발굴 결과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의 기록에 의하여 이러한 武王과 선화공주의 사랑에 얽힌 설화의 진위가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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